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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대 한인여성리더 워크샵, 4인4색 희망의 울림



“4인 4색, 희망의 울림”


지난 10월 24일 Forum 104에서는 재불한인여성회AFCF KOWIN France(이하 "여성회")가 주최한 차세대 한인 여성리더 워크샵이 개최되었다. 행사는 발열체크, 좌석 간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청중에게는 마이크를 허용하지 않는 등 엄격한 위생관리 속에서 진행되었다.

모임 인원은 주최 측을 포함하여 50명으로 제한되었으나 4명의 강연자가 풀어놓은 색깔 있는 강연과 청중들의 반응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하경미 여성회 회장은 축사에서 “세계로 진출한 한국여성 인적 자원들을 네트워킹하고 차세대 여성 리더들을 위한 사업을 다각도로 진행하고 있다”며 재불한인여성회를 소개하였다.

강연 후 좌석배치를 바꾸어 강연자를 둘러싸고 앉아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선선하고 따뜻한 눈빛들은 수월하게 오갔다.

1. 나만의 스토리텔링 찾기 송민주 감독/작가/통번역가

“저는 이야기를 팔아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송민주 감독은 박완서 소설가의 ‘나목’ 한 대목을 낭독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이야기를 엮는 일은 나의 이야기를 마주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필터링 없이’ 풀어내는 것이 스토리텔링의 시작이다. 자신을 솔직하게 대면하는 작업을 통해 ‘Ma famille sans frontière 2019’가 완성되었다.

주변의 이야기는 아침에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집에 들어갈 때까지 이어진다. 어느 날 한국인 남편과 이혼한 프랑스 여성이 송 감독을 찾아왔다. 그녀는 단지 송 감독이 한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찾아왔다고 말했다.

“전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가버렸어요.”

송 감독은 가만히 그녀의 말에 귀 기울였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반응한 작품이 ‘Jamais sans ma fille, 2016’이다.

마지막으로 프랑스에서 한국인 감독이라는 점을 활용하여 한국에 관한 다큐나 르포도 많이 제작했는데, 덕분에 고국의 뿌리 찾기도 가능했다. 그 점을 엿볼 수 있는 다큐 중엔 이산가족 상봉을 다룬 ‘Les dernières retrouvailles’가 대표적이다.

“이야기를 짓는 일은 심리적 즐거움과 함께 물질적 보상까지 줍니다.”

프랑스 북부도시 릴에서 한글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고 있는 송 감독의 강연 마지막 문장은 첫 문장과 같았다.


2. 파리 모델리스트로 살아가기 신현주 렉트라 모델리스트

“방금 가장 바쁜 시즌이 끝났어요.”

신현주 모델리스트는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에서 산 세월이 더 길다. 부모님 말씀 따라 살다가 부모님 계획대로 유학 오고 짜인 일정대로 생활했다. 예정대로라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시집’가는 수순을 밟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방금 막 가장 바쁜 ‘시즌’을 끝냈다.

그녀의 첫 학교는 Studio Berçot였다. Berçot의 디자이너, 그곳에서 스스로 깎아내는 과정을 거치며 Studio Berçot화되었다. 그 이후 교수님의 추천으로 유명한 메종(KENZO, DIOR, 잡지사 Jalouse )들의 인턴 사원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많은 경험을 하게 되면서 점 점 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겐조의 패션쇼 담당 파트에서 일할 때는 모두가 외국인이었으나, 100% 프랑스인 동료들만 있었던 겐조 진스에서는 동료들의 질시를 받았다. 유일한 외국인이어서 잘해도 튀고 못해도 튀는 위치 탓에 스트레스가 컸다.

겐조 진스를 나와 ‘모델리즘’ 공부를 더 하게 되었고 입체재단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과 독창적이어야 살아남으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모델리스트는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를 패턴으로 구체화시키는 사람이다. 모델리스트 수업을 하면서 교수님의 추천으로 운이 좋게 의상 연구소 bureau d’étude에 들어갔는데 디자인을 하다가 패턴을 하는 사람이 드물어서인지 상사의 애정이 남달랐다. 대신 정확도를 우선시하는 성향은 동료들로부터 반감을 샀다.

밤낮 일하고 해외 출장까지 잦아지자 정체기가 왔다. 일하는 시간이 적은 오뜨꾸뛰르 회사로 옮겼는데 그동안 잘 안 되던 임신이 되었다. 그의 임신에 상사는 회사를 그만두면 좋겠다는 말로 축하를 대신했다. 충격이었다.

출산 후 3년이 지나서 그는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미국식 거버(Gerber) 시스템만 알던 그가 렉트라(Lectra)시스템 전문가과정을 듣게 된다. 그리고 디올로 가게 되었다. 3년 쉬고 6주 공부 후 전선으로 복귀하자니 무서웠다. 일 자체보다 인간관계가 힘들었다. 역시 동양인이라 잘해도 못해도 눈에 띄었는데 intérim은 프리랜서 개념이라 그나마 나았다.

그리고 지금은 랑방에서 Modéliste Patronnière Lectra로 근무 중이다.

그는 그동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지금은 아이와 함께 나의 중년을 맞이하고 있다며 물론 결혼과 출산으로 중간에 몇 년의 공백기가 있었지만 계속 한곳에 집중하고 노력하다 보니 또 다른 이름의 제자리에 앉게 된 것 같다고 전한다.

“스스로 개척하며 내 자리를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유학 초기에는 울면서 부모님 원망 많이 했는데 지금은 부모님께 감사해요.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한만큼 나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현재의 나를 믿고 자신감을 가지고 충실히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지난일을 추억하며 웃을 날들이 반드시 올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며 말을 맺었다.

3. 프로 N잡러의 끝없는 도전 김아람 통번역사/디지털 컨설턴트/공인가이드/굿파리투어 CEO/재불한인여성회 기획국장

“파리 생활 27년차 김아람입니다.”

스스로를 프로 N잡러라고 소개하는 김아람 통번역사의 목소리에서 힘 있는 관록이 드러난다. 공식직함만 5개, 사람을 만나면 즉석에서 명함을 골라 내주어야 할 만큼 어쩌면 번거로운 숫자다. 1명이 여러 가지 프로페셔널한 직업을 동시에 가진 사람을 프로 N잡러라고 한다.

기자이면서 주재원이던 아버지와 시간을 많이 가지고 여행을 많이 했던 것이 파리생활의 토양이 되어주었다. 부모님 의지로 어린 시절 4년 동안 국제학교 대신 프랑스국립학교를 경험하고 한국으로 귀국한다.

그후 당차게 도전해본 불어경시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한 계기로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어느 세계에서든 진로 선택과 구직의 벽 앞에서는 어려워진다. 세계화를 겨냥하며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는 쪽으로 구직 사이트에 CV를 올리게 되었다.

“저는 프로 도전러입니다.”

첫 직장은 구로구와 자매결연 맺은 이시레물리노 시 소속의 커뮤니케이션 회사였다. 마침 한불수교 120주년 행사를 준비하며 진행할 사람이 필요했다. 단순한 진행이 아니라 디지털에 능한 웹에디터면서 한국과 프랑스 문화를 모두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노동허가증도 없던 학생에게 이력서만 보고 채용하고 싶다는 프로포즈가 온 것이었다.

2년 후 몸값을 올리며 이직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사이 아르바이트 통번역을 하는 동안 대사관, OECD, 한국문화원 등을 두루 거쳤는데 꼰대 아저씨 분위기에 질리고 말았다. 덮어놓고 삼성이 싫었던 그에게 삼성에 입사할 기회가 생겼다. 부모님은 좋아하셨다. 삼성이니까. 결국 취직되었고 프랑스 상사가 계속 남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삼성계열의 광고기획사인 제일기획 디지털 마케팅 매니저로 일하게 되었다.

고정관념과 두려움을 떨쳐내고 그냥 부딪혀 보기, 한편으로 워커홀릭 라이프이기도 했다. 덕분에 진급은 빨랐으나 가정은 꾸리지 못했고, 어느 순간 번아웃 되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퇴사를 고민하던 차에 파리에서 촛불집회가 열렸다.

“박근혜 아웃, 이재용 아웃!”

외친 덕분에 회사에서 끌려갔다.

“퇴직금 잘 받고 쇼마쥬 받고 아름답게 퇴직하였어요.”

그는 관성대로 비슷한 직종을 바라보지 않고 Pole Emploi 교육비 지원을 통해 가이드와 디지털을 접목하여 창업을 결심하게 된다.

새롭게 끌리는 많은 것들에 도전하는 동안 2019년 칸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 팀을 통역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샤론최만 알고 나는 몰라요.”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지금은 재택근무를 하면서 주식공부도 하고 있다는 그는 ‘해보고 싶은 게 많고 호기심 많은 사람, 만지고 움직이는 거 좋아하는 사람’에게 프로 N잡러를 권했다.

“2011년 처음으로 재불한인여성회와 첫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해 차세대 여성리더 양성 워크샵 사진에 제가 있네요.”

그가 여러 장의 명함들 속에서 꺼내준 여성회 카드에는 ‘기획국장’이라는 직함이 찍혀 있다. 영상, 만화, 도서 번역을 통해서도 부수입을 올린다는 그는 마지막으로 스크린에 이메일 주소를 올렸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4. 프랑스에서 피아니스트로 살아가는 이야기 이예빈 피아니스트

이예빈 피아니스트는 자기소개를 대신해 디지털피아노 앞에 앉았다. ‘Gabriel Fauré의 Après un rêve op.7 no.1’이 꿈결처럼 인생처럼 흐르다가 넘치더니 멈추나 싶은 순간 날아올랐다. 장내의 분위기가 일순간에 확 바뀌었다. 노랑으로 시작해 빨강을 거쳐 보라를 지나 마침내 네 번째 순간에 무지개에 도달한 시간이었다. 연주가 끝나고도 잠시 동안은 박수소리가 없었다. 청중 모두가 여운을 음미했다.

“피아니스트 이예빈입니다. 저는 오늘 인생과 꿈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프랑스로 유학 온 계기는 고등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으로 떠난 음악캠프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교육환경을 맛보고 눈을 뜨게 되었다.

“독일에 가보니 음악 하는 학생들이 사람 취급을 받고 있었어요! 게다가 프랑스는 날씨가 굉장히 좋았습니다. 그땐 프랑스가 1년 내내 그렇게 날씨가 좋은 줄 알았죠. 암튼 아 여기에 오면 스트레스 없이 피아노 칠 수 있겠다 싶었어요.”

돌아보면 한국에서 음악 공부하는 학생들은 ‘존중’에 목말라 있었다. 작품이 실패하면 마치 자기 자신이 없어진 것처럼 좌절하기 쉬운 환경이기 때문이다. 유학에 대한 바람이 도무지 꺼지지 않았다.

프랑스 선생님으로부터 “예빈은 건반을 무서워하는 것 같아”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피아노를 치는 이유를 고민했다. 예중과 예고에서 시험 위주의 주입식 교육에 주눅 들었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현재 프랑스에서 지도교사로 일하는 중이다. 시난고난해도 무엇보다 피아노가 좋았다. 요즘은 답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

“너 피아노 왜 쳐?”

프랑스인 제자들은 고민 없이 미나 솔처럼 대답했다. 단지 건반 하나가 예뻐서라든가 하는 단순한 이유가 자유롭고 명료하게 툭툭 터졌다.

이전에는 피아노가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표현 가능케하는 악기여서 또는 피아노를 안 치면 인정받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연주한다고도 생각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하며 살 수 있다니...”

어렵고 고통스럽던 피아노가 비로소 아름다운 음악이 되었다.

그는 20대 초반에 친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지만 덕분에 사람마다 원하는 라이프스타일이 다르다는 사실도 배웠다. 아이를 갖고 가정을 꾸려 저녁이 있는 삶을 택한 친구, 공부와 삶 둘 다 중요하게 생각하는게 당연한데 잊고 산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한다. 이예빈 피아니스는 자신의 이력을 소략하게 보여주면서 단계마다 어떤 고민이 있었는지 소개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Conservatoire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다.

학생들 가르치는 꿈을 이뤄가던 중 한편에서 ‘듀오 글리신’을 창단하였다.

“너희가? 하면서 다들 비웃었어요. 우린 기죽지 않았어요. 무대뽀 정신과 자기피알이 필요해요. 프랑스니까요.”

모두가 미심쩍어 하던 ‘듀오 글리신’은 올해 1월 쁘띠 빨레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예술가들이 힘든 시기이니 이 어려움이 지나면 꼭 불러주세요!”

피아니스트에게 디지털피아노를 연주하라는 것은 무례일지도 모른다. 어쿠스틱 피아노에 비해 전자피아노는 소리와 터치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예빈 피아니스트는 적은 건반 개수에 맞는 곡을 찾아왔다며 건반을 힘차게 넘나드는 연주를 시작했다.

글 /신혜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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